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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만화

간단히 보는 임진왜란 만화

by 고자길동 2015. 6. 29.



















































1592년 음력 4월 29일 충주의 패전보가 도성에 도착했다.


충청도군과 한양의 정예군을 이끌고 충주로 향했던 신립의 패전 소식에 온 도성 안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조정에서는 급히 재상들을 불러 피난할 것을 의논하였다.


음력 4월 30일 새벽 2시경 선조는 말에 올랐다. 그 뒤로 여러 종친, 의정부 정승, 6조 판서
등 고관들이 말에 오르고, 돈의문 밖으로 빠져 나갔다. 그 밖의 관원들은 도보로 뒤를 따랐다.
모두 합쳐 100명도 안되는 인원에 호위병도 없었다.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떠나는
임금을 본 도성은 백성들은 분기는 하늘을 찔렀다.


성난 난민들은 제일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습격하여 공사 노비의 문서들을 불태우고, 내
탕고에 들어가 금과 비단 등을 약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불태웠다.


한편, 한강에서는 우상 이양원을 도성 수성 대장으로 하여 김명원을 도원수, 이진, 변언수,
신각을 좌, 우, 중위대장을 삼고 왜적이 한강을 도하하지 못하도록 한강의 모든 배를 반대
편에 모아놓고 한강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충주에서 병력을 대부분 잃어 그수
는 몇 천에 지나지 않았다. 


왜군이 한강 반대편에 집결하자 놀란 도원수 김명원은 임진강으로 퇴각을 주장하고, 부원수
신각은 도성을 포기할수 없다고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왜군이 헤엄쳐 한강을 건너려는 척을 하자 놀란 도원수 김명원은 어가를 호위하러 간다는
구실로 임진강 방면으로 도망하였다. 이를 본 조선군이 사기가 떨어지고우왕좌왕하여 뿔뿔
히 흩어져버렸다.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 임진강으로 가지 않고 군을 수습하여 이양원을 따라 경기도 
양주로 퇴각하였다.


한강을 방비하던 조선군이 퇴각하자 일본군은 5월3일 동대문으로 제1군 고니시의 군대가,
5월 4일 남대문으로 제2군 가토의 군대가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무혈입성하였다. 개전 20일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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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 입성한 고니시와 가토의 군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도주하였고, 궁궐과 주요시설들이 불에 탔으며 백성들은 마치 개선군을 반기 듯 일본군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왕이 아직 멀리 달아나지 못하였을 것이라 보고 기병 100기를 추격병으로
보낸다.


한편, 양주에서는 부원수 신각의 진영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이 병사 5000을 이끌고
합류하여 왜군을 방비할 대책을 논한다.


적이 개성으로 향하려면 양주의 해유령 길목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 예상한 신각은 군을
해유령에 매복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가토의 추격병이 해유령에 들어섰다.


좌우 협곡에서 장전과 편전을 쏘아대고 나무와 돌로 길목을 막으니 적이 우왕좌왕했다.




적이 혼란한 틈을 타 신각의 군대가 돌격하니 적기병들은 풍비박산하였다.
 

해유령에서 신각의 조선군은 적 기병 수급 60여개를 베고 승전보를 조정에 올렸다. 해유령
전투는 조선군이 왜군에 이긴 첫전투이며 이전투로 바닥에 떨어진 조선군의 사기가 하늘
을 찔렀다.


한편, 임진강으로 도망가있던 도원수 김명원은 자신의 도주와 신각의 승전보를 선조가
받게 된다면 자신이 위험해 쳐해질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김명원은 한강의 패전이 부원수 신각이 명령을 어기고 군율을 무너뜨려 군졸들이 도망
한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무고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린다.
 

개성에 머물고 있던 선조는 크게 화내며 신각을 처벌하라고 선전관을 양주로 내려보냈다.


해유령에서 왜군을 방비하고 있던 신각은 뜻밖의 선전관이 가져온 어명에 크게 놀란다.


신각은 부들부들 떨리며 상방 검을 받고는 선전관에 자신의 억울함과 도원수의 죄를 고하
고는 말을 마치자 선전관에 의해 참수되었다.


신각이 참수되자 장수와 군사들은 석양 꺼지는 해에 눈물을 아니 뿌릴 수 없었다. 억울하기
한량이 없는 죽음이었다. 적을 무찔러 이기고도 죽었다. 병사들이 신각의 시체를 수습할때
두번째 선전관이 도착하여 신각을 베라는 명을 거두라고 외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신각을 참하라고 선전관을 보내고 난 뒤 해유령의 승전보가 조정에 도착하여 참수형을 취
소하는 두번째 선전관을 보낸 것이었다. 신각의 참형소식을 들은 선조는 자신의 부덕에
잃은 장수를 안타까워하며 울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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